💉조선의 '백신' 도전기: 다산 정약용과 박제가가 꿈꾼 질병 없는 세상
오늘날 우리는 백신 접종을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염병이 '귀신의 소행'이나 '하늘의 형벌'로 여겨지던 조선 시대에, 과학적인 태도로 전염병에 맞서 싸운 선구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구한말 지석영 선생의 종두법보다 무려 80년이나 앞서, 조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과 초정 박제가가 시도했던 눈물겨운 '백신 도전기'를 소개합니다.

1. 전염병의 공포와 아버지의 눈물
조선 시대에 가장 무서운 질병은 단연 **천연두(마마)**였습니다. 한 번 걸리면 목숨을 잃기 일쑤였고, 살아남더라도 얼굴에 깊은 흉터(곰보 자국)를 남겼습니다. 왕실조차 이 질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으며, 민간에서는 '손님'이 오셨다며 제사를 지내 달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실학의 대가 정약용에게 천연두는 단순한 연구 대상이 아닌 개인적인 비극이었습니다. 정약용은 생애 동안 9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중 6명을 전염병(천연두와 홍역)으로 먼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아이들이 앓을 때마다 나는 밤잠을 설치며 하늘에 빌었으나, 의술이 없어 아이를 품 안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정약용이 남긴 기록에는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피맺힌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는 이 비극이 자신의 가문뿐만 아니라 조선 전체의 고통임을 직시하고, 전염병을 치료할 실질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의학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2. 박제가와의 만남, 그리고 서양 의학의 도입
정약용이 이론적 토대를 닦았다면,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인물은 북학파의 선두주자 박제가였습니다. 1790년대, 박제가는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당시 중국에 도입되어 있던 서양의 **'종두법'**에 관한 정보를 가져옵니다.
당시 도입된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 인두법(人痘法): 천연두를 앓는 사람의 딱지를 가루 내어 건강한 사람의 코에 불어넣는 방식입니다. 효과는 있었으나 가끔 진짜 천연두에 걸려 사망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 우두법(牛痘法):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가 발견한 방식으로, 소의 전염병인 '우두'를 사람에게 접종하는 것입니다. 훨씬 안전하고 획기적인 방법이었죠.
박제가는 청나라에서 얻은 종두법 관련 서적인 《종두심법지장》을 정약용에게 전달했고, 두 사람은 이를 바탕으로 조선인의 체질에 맞는 접종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약용은 자신의 의학서 **《마과회통》**의 말미에 '신종방(新種方)'이라는 부록을 덧붙여 종두법의 원리와 시술 방법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3. 조선 최초의 백신 임상시험
기록에 따르면 정약용과 박제가는 단순히 책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접종을 시행했습니다. 박제가는 직접 아이들에게 종두를 시술하여 효과를 증명해 보였고, 정약용 또한 유배지 등에서 백성들에게 이 방법을 전파하려 애썼습니다.
이는 지석영 선생이 1879년 일본에서 우두법을 배워오기 훨씬 이전의 일입니다. 만약 이들의 노력이 국가적 사업으로 채택되었다면,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천연두를 정복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의 혁신적인 시도는 거대한 벽에 부딪힙니다.
-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소의 고름을 사람에게 넣다니 천인공노할 일이다"라는 성리학적 명분론이 강했습니다.
- 정치적 탄압: 정조 사후 천주교 박해와 세도 정치의 시작으로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이 조정에서 물러나면서, 이들의 의학 연구는 국가 정책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4. 정약용의 실사구시: 과학이 곧 민생이다
정약용의 백신 도전기는 단순한 의학적 호기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실사구시(實事求是)', 즉 실제적인 일에서 진리를 구하고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실천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마과회통》에서 전염병은 귀신이 주는 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물질(기운)에 의해 전파되는 질병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미신에 빠져 소중한 목숨을 잃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그는 서양 의학이라는 파격적인 규제 혁파를 택한 것입니다.
5.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정약용과 박제가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첫째, 데이터와 현장에 근거한 문제 해결입니다. 정약용은 자식을 잃은 슬픔에만 머물지 않고 수많은 의서를 섭렵하며 데이터(처방전)를 수집했습니다.
둘째, 열린 마음으로 신기술을 수용하는 자세입니다. 당시로서는 외계인의 기술만큼이나 낯설었을 서양의 종두법을 편견 없이 받아들여 조선의 현실에 맞게 재해석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다양한 규제 갈등과 신기술 도입 문제에서도 이들의 정신은 유효합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하는 일이라면 기존의 관습을 깨고 혁신을 선택했던 두 실학자의 용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에필로그: 잊힌 선구자들을 기억하며
지석영 선생이 우두법을 공식화하며 '종두의 아버지'로 추대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길을 닦기 위해 80년 전 이름 모를 아이들에게 종두를 놓으며 밤을 지새웠던 정약용과 박제가의 고군분투 또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합니다.
과학은 기록으로 전해지고, 그 기록은 시대를 넘어 누군가에게 영감이 됩니다. 정약용이 남긴 《마과회통》은 결국 지석영에게 이어졌고, 오늘날 대한민국 의료 강국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가 유익하셨나요? 과거의 혁신가들이 보여준 열정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의 물결을 이해하는 데 작은 힌트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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