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경성지방법원: 법정의 외피 속 침탈과 저항의 역사
1. 일제 식민지 통치의 중심이 된 법정
1910년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면서, 한민족의 사법 주권은 완전히 해체되고 새로운 식민 통치 법제가 도입된다. 그 상징적 현장이 바로 경성지방법원이었다. ‘경성지방법원’은 한반도 중심지였던 서울에 설치되어, 민사·형사 재판은 물론이고 정치·사상범 관련 사건까지 전방위적으로 관할한 기관이다. 표면적으로는 근대 사법제도의 근간을 이식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을 통제·억압하는 일제의 통치도구로 기능했다.
2. 경성지방법원의 설립과 구조
경성지방법원은 처음 ‘경성지방재판소’로 출발했다가 1912년 ‘경성지방법원’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일본은 본국의 3심 3급 법원 체계를 그대로 가져와 고등법원(심사/항소), 복심법원(중간심), 지방법원(1심)으로 운영했다. 이 때 판사, 검사, 서기관 대부분을 일본인이 독점했으며, 몇몇 조선인 법조인의 존재는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
일제는 일본의 형법·형사소송법을 그대로 적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조선인 피고에게 강압적 예심(豫審) 및 태형(등에 매질), 장기 구금과 방어권 박탈 등 인권침해적 절차를 일상화했다. 권력은 총독부 직속의 검사국·경찰국과 철저히 유기적으로 연동되었다.
3. 법정은 억압의 무대였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은 식민지 현실의 축소판이었다.
독립운동가 탄압: 3·1운동 이후 수많은 민족지도자, 학생, 평범한 민중들이 체포돼 경성지방법원에 기소됐다. 법정에서 일본인 판사들은 대량의 징역, 태형, 사형까지도 선고했다.
치안유지법·신문지법 위반: 독립운동 뿐 아니라 신문, 잡지, 출판, 문화운동 등 다양한 사회활동가, 문화인, 언론인이 치안유지법, 신문지법 등으로 재판을 받았다. 일제는 반일 사상*,* 사회주의*,* 민족주의자의 언론·이념활동 자체를 단죄했다.
사상부 활동: 1925년 이후 검사국 내에 설치된 ‘사상부(思想部)’는 사회운동, 학생운동, 노동운동가들을 ‘사상범’으로 분류해 집중 단속했다. 이들은 형식적 재판을 통해 장기 구금, 장기 재판, 태형 등 처벌을 가했다.
연도 | 대표사건 | 내용 및 결과 |
1919 | 3.1운동 재판 | 민족대표 등 수천 명 징역·실형 선고 |
1925 | 사상법 적용 | 사회주의자, 민족운동가 집중 처벌 |
1932 | 윤봉길 의거 | 대표 독립투사, 사형 및 장기형 선고 |
1937 | 문화인 재판 | 출판, 언론계 인사 치안유지법 위반 인정 |
4. ‘법의 탈을 쓴 권력’ – 식민 사법의 실체
경성지방법원에서는 일본 법이 기계적으로 적용되었으나, 실제 재판은 조선인의 권리·존엄을 철저히 무시했다.
불평등한 법정구조: 판사, 검사 대부분이 일본인이고, 임금 및 승진에서도 일본인과 조선인 간 차별이 극심했다.
강제 구금 및 방어권 제한: 예심과정에서 장기간 물리력, 심문을 동원해 조선인 피고인의 권리를 박탈했다.
사법의 이중성: 법의 이름으로 모든 항일운동과 사상의 자유, 민족의 저항 정신을 무력화하려 했다.
5. 일상 재판 속 한민족 생활상
경성지방법원에는 독립운동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인의 삶을 보여주는 각종 민·형사 사건도 쌓였다. 소송, 채무, 환경, 살인, 절도 같은 사건의 판결문, 조서, 합의 기록은 식민지 시기 조선인의 법적 지위와 생활상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일본인 우선주의 원칙: 일본인 원고, 피해자에게 훨씬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서민의 권익 박탈: 조선인 피고의 변호 기회, 재심 청구 등은 사실상 인정받기 어려웠다.
6. 남겨진 기록의 힘과 의미
경성지방법원에서 남겨진 각종 재판기록, 판결문, 검사국 자료, 심문 기록 등은 일제 통치와 민중의 고단함, 저항의 의지, 사회 변화의 내면을 담고 있다. 이 기록들은 현재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연구와 공개를 지속 중이며, 식민시기 법제·인권 연구의 중요한 사료다.
7. 결론: 그 법정에 남은 교훈
경성지방법원은 표면적으로는 근대 사법기관의 외형을 띤 장소였으나, 실제로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법적 도구’였다. 그곳에서 선고된 수많은 침탈, 억압, 절규와 저항의 흔적은 오늘 한국사회가 ‘정의·법치·인권’의 가치를 고민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적 경고장이다.
경성지방법원의 아픈 기록과 기억은 법의 본질, 국가의 책임, 한 시대가 남긴 뼈아픈 교훈으로 우리 사회에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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